진주형씨 세보(晋州邢氏世譜) 

 

      참고: 현재 기록되는 이곳은 중시조 형병(邢昞)을 一世로 하여 기록된 것입니다.

  

     한국시조(始祖): 형 옹(邢 )이시다.  (세계표 보기)             

  korea01.gif 형씨시조(邢氏始祖)는 성왕(成王)때 즉 주공(周公)넷째 아들을 형후(邢侯)로 봉(封)한 것이 근본이다.    형씨(邢氏)의 유래(由來)는 서주(西周: BC 1057년~BC 771년) 무왕(武王)의 동생 휘(諱) 단(旦)의 건국호(建國號)는 주(周)이며, 넷째 아들인 휘(諱) 정연(靖淵 ;()으로 불렸다)을 형후(邢侯)에 봉(封)하였으니 형옹(邢)의 시조(始祖)이다.     주공(周公)의 사적(史蹟) : 주(周) 나라는 웨이수이강(황하(黃河)로 흐르는 지류(支流))이 흐르고 있는 곳으로 당시의 수도(首都)는 시안(서주에서 당나라까지 사이의 수도였음)이고, 태공망(강태공)이 주(周)나라 초(初)의 정치가이다. 주나라의 서백이 죽은 후 큰 아들 발이 서백의 뒤를 이었으나, 주공(周公)이 건국(建國)하였다. 이리하여 제후의 영지(領地)가 결정되어, 무왕(武王)의 동생인 주공(周公)에게는 노(魯)나라가, 태공망에게는 제 나라가 주어졌다. 이것이 주(周)나라의 봉건제도의 시작이다.(수도는 호경) 무왕(武王)이 죽은뒤 그의 아들이 왕위(王位)에 올라 성왕(成王)이 되니 주공(周公)이 어린 성왕(成王)을 도와 나라를 보살피기 위해 노나라는 자신의 장남 백금에게 물려주고 어린 조카를 도와 정치(政治)를 하였다.  주공은 성인이 된후의 성왕에게 모든 정권을 물려주니 성왕은 은혜로 주공의 4째 아들 정연(靖淵)에게 형후(邢侯)로 봉한 것이다. 그리고 성왕(成王)과 주공(周公)에 의해 봉건제도(封建制度)가 정비(整備)되어 주왕조(周王朝) 300년의 기초(基礎)가 다져졌다. 주공(周公)은 주(周)나라의 정치가로서 후세(後世) 사람들에게 성인(聖人)으로 불리었으며, 공자(孔子)도 이상의 정치가로 존경하였다. 공자(孔子)는 춘추시대(春秋時代:B.C 562~479년) 때이고 노(魯)나라에서 태어났으며, 유교(儒敎)를 창시(創始)하였다.

누세후(累世後) 휘(諱) 옹()은 형후(邢侯) 35세 손이고 그의 9대손 대보(大寶)는 당(唐)나라 태종(太宗) 정관 8년인 고구려(高句麗) 영류왕(榮留王: 서기 618-641년) 17년 때 영류왕의 요청(要請)에 의하여 (서기 634년) 8학사(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벼슬이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으며, "당(唐)나라 문화, 문학, 유교 보급"에 공헌하고 관향(貫鄕)을 남양(南陽 :現 수원부근)으로 사향(賜鄕) 받아 뿌리를 내렸다.    형(邢)나라 (형태(邢台) 싱타이(Xingtai)시)

 

 

                   진주형씨 세보(晋州邢氏世譜) 시작

1 世 : 형 병(邢 昞) (중시조(中始祖) 1世祖       중시조알기     

   고려(高麗) 때 이부상서(吏部尙書:正三品: 正二品)를 지냈다. 서기 850년경 출생하였는데 우리 나라는 신라 문성왕 12년이고 발해 이진왕 21년 때이다.  이 때에 우리 나라에서는 불교 문화의 발전으로 당나라로부터 승려와 불경 등을 계속 받아들였다.  

진주형씨의 후손들은 시조 이후의 조상님들의 행적을 찾을 수 있는 많은 고서적을 찾아 연구 했으나 고구려의 역사 즉; 고구려는 서기 668년 9월에 신라(新羅)에게 망(亡)하고 신라는 고려(高麗)에게 서기 936년 9월에 망(亡)한 268년과 고구려말 34년을 합한 약 302년간의 우리조상(祖上)의 행적(行蹟)을 찾아볼 수 있는 고서적(古書籍)을 얻지 못하여 구보(舊譜)의 별록에 기록되어 내려왔든 휘병(諱昞)을 중시조 1세(中始祖 一世)로 삼아 구보 일세휘방(舊譜一世諱昉)의 상계(上系)에 십이세(十二世)를 수개(修改)하여 계대(系代)을 이어서 계미대동보(癸未大同譜) 부터 중시조(中始祖)로 삼아 계대(系代)를 이어 나왔다.   

후손들은 선조님의 행적을 찾고자 많은 노력을 하였고 학자이신 형남표(南表)님은 오랜 세월 노력을 하였으나 행적을 못 찾고 후손들에게 숙제로 남겨주었다.  본 홈페이지를 구축한 형백우(邢栢宇)(대종회 제 17,18대 회장)은 형남표(南表)(대종회 8,10대 회장)님의 수집한 모든 자료와 정보를 통해 약 6년간에 걸처서 사이트를 완성하여 서기 2000년에 공식적으로 오픈 하였다.  그러나 형옹()자와 중시조 병()자 사이가 시대적 차이가 있음을 알고 본인(형백우)이 2015년 대종회장 직무를 맡으면서 선조님의 행적을 찾는 뿌리찾기를 시작하였다.

  직장동료의 도움으로 중국에 계시는 지인에게(고재관;高在) 한통의 편지룰 보내 시작되어 중국에 있는 같은 형씨와 연결이 되었다.  최초 형업상(业祥), 형계화(桂华);(중국판사) 남매와 연결되었고, 그후 알게된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했었든 형유순(维顺);(텬지시 종친회부회장)을 통해 족보연구가 형지명(邢志明);(저장성 종친회부회장)와 함께 행적을 찾게 되었다.

  형()과 병()자 사이는 약1383년 동안 모르고 지내어 오다가 뿌리 찾기 노력으로 한국 형백우(邢栢宇), 중국 형지명(邢志明), 형유순(维顺)과 통역관 고재관(高在观)에 의해 201710월에 최종적으로 13인명을 찾아 한중 양국이 확인하게 되었고 한국 진주형씨 대종회장 형백우(邢栢宇)외 위원단과 중국 전국형씨종친회장 형계주(邢继柱)외 대표단이 확인 서명을 하였다. 최종 확인을 위한 인명의 계열과 연도의 정확성을 찾고자 20189.30~10.3일 진주형씨대종회 뿌리찾기 특별위 일행 12(위원장;형백우(박순희), 형창섭, 형시영, 형춘기(이덕순), 형광석, 형남신, 형남웅, 형창수, 형남을, 형옥주)이 중국 절강성을 방문하여 일부 잘못된 계열과 누락된 연도 인명을 찾아 바로 잡게되었다. 찾은 함자(인명)는 총 14인명이며 다음과 같다. 한국시조 형 옹()-"()-()-()-()-()-()-()-()-대보(大寶)-굉도(宏道)-()-()-군아(君牙)의 二子-()"-중시조(中始祖) 1(): (昞). 최종 찾게된 지역은 중국 절강성 승주시 승주섬서 형씨종보와 금화오당 형씨종보를 통해서 찾을 수가 있었다.  중국 형씨종친회 부회장 형력책(邢力策)님의 설명은 중국 형가(家) 선조님들이 정부의 명을 받고 한국을 다녀간 사람은 시대에 따라 수차례 왕래 하였다고 한다. 현재 중국 절강성 승주시 태평 마을에는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있는 형달(邢)님의 성지가 있다.   

  참고: 뿌리찾기를 하면서 연구하고 조사한 바에 의하면 중국에서는 각 분파별로 족보를 만들면서 자신의 뿌리를 중심으로 하였으며, 연결이 안되는 부분의 연대는 기록를 하지 않은 부분도 있어 통일성이 없었다.  즉, 어느 족보에는 같은 인명의 후손이 기록되어 있지만 어느 족보에는 후계손이 없는 부분은 기록을 하지 않았다. 앞으로 중국의 통일된 족보와 세계적인 형씨들의 정보가 기록될 대대적인 사업이 계획중이다.  통일된 족보가 완성이 되면 좀더 조사를 하여 선조님들의 자세한 행적들을 찾아서 추가적인 기록을 하여야 된다고 사료된다. (진주형씨대종회 뿌리찾기 특별위원장: 38世;형백우 배상)

2 世: 형 적(邢 積)

   고려의 개국 공신이다. 신호위상호군(神護衛上將軍: 正三品) [고려사]의 기록에 의한 고려시대의 전항을 할펴보면 고려(高麗)는 서기 918년 발해 애왕 18년에 왕건(王建)이 추대되어 태조(太祖)로 즉위하고 국호(國號)를 고려(高麗)로 삼았다.
  발해(渤海)는 서기 926년 거란(거丹)이 발해 국도(國都) 총한성(悤汗城)을 쳐 빼앗음으로 멸망하였다. 후백제의 질자 진호(眞虎)는 고려에서 죽었고 견훤은 고려의 질자 왕신(王信)을 죽이고 고려를 쳤다. 견훤은 금성(金城)에 침입하여 신라의 경애왕(景哀王)을 자살케하고 56대(代) 마지막 왕(王) 경순왕(敬順王)을 세웠다. 또한 고려 태조(太祖)는 공산동수(公山桐藪)에서 견훤에게 대패를 당하였다. 서기 928년 5월에 견훤은 강주(康州)를 공격하고 11월에 고려의 부곡성(缶谷城)을 공격하였다. 서기 929년 견훤은 의성부 순주를 공격하고 고창군(古昌郡:現 安東)을 공격하였다.
서기 930년 고려는 고창(古昌)에서 견훤군을 대좌하여 견훤의 침입을 막아 이후에 견훤은 고려를 침입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국란에서 고려(高麗) 태조(太祖) 11년(서기 928년) 2월에 후백제(後百濟) 견훤의 군사와 각처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고려군은 육지에서 우뢰같이 달리고 번개처럼 쳤으며 수전(水戰)에서는 범같이 치고 용처럼 날쳐 움직이면 반드시 공(功)을 이루고 일으키면 헛되이 발함이 없었다. 견훤(甄萱)의 부하 윤빈을 해안에서 쫓으니 병

갑(兵甲)이 산(山)처럼 쌓이고, 추조를 변성에서 사로잡으니 전사자의 시체가 들판을 덮었다. 연산군(現 충남 연기) 계(界)에서 길환(吉奐)을 군전(軍前)에서 베었고, 마리성변(現 경남 거창군 마리면)에서 수오(隨晤)를 독하(纛下:元帥의 아래)에서 죽였으나 임존성(任存城: 大興城)을 뺏던 날 치열한 전두로 형 적(邢積)등 수백명(數百名)이 전사(戰死)하였다.

  형 적(邢積)은 서기 875년경 출생하여 서기 928년(고려 태조 11년) 2월에 손구(損軀:전사함)하였는데, 당시 나이 53세경이다.

3 世: 형 순(邢 順)

   예빈경 으로 신라 마지막 임금(敬順王)이 나라를 고려에 넘겨주던 서기 935년 후당(後唐)에 사신으로 들어가 이 같은 사실을 알린 인물이다. 석경당이 후당을 무너뜨리고, 후진(後晋)을 세우자 937년 왕규와 함께 황제의 등극을 축하하는 사절로 다녀오기도 했다. 그는 왕건 밑에서 문장과 지모를 발휘하여 밀직사(密直史: 從二品)에 추봉됐다.

아래: 내용보기

   밀직사(密直史) 종이품(從二品) 형 순(邢順)은 서기 895년경 출생하여 서기 935년(고려 태조 18년) 후당(後唐)에 예빈경(禮賓卿)으로 다녀왔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한 당시의 국내 정계 상황을 보면 견훤(甄萱)의 아들 신검(神劒)이 그 아비를 금산(金山:지금의 김제) 불우(佛宇)에 가두고 그 아우 금강(金剛)을 죽였다. 처음에 견훤에게는 첩이 많아 아들이 10여인이나 있었는데 넷째 아들 금강(金剛)이 몸이 장대(長大)하고 지혜도 많음으로 견훤이 특히 그를 사랑하여 그 위(位)를 전(傳)하려 함에 그 형(兄) 신검(神劒), 양검(良劒), 용검(龍劒) 등이 이를 알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 때에 양검과 용검은 나가서 외방(外方)을 진수(鎭守)하고 있었고 신검만이 홀로 곁에 있었는데 이찬(伊粲) 능환(能奐)이 사람을 시켜 양검, 용검과 함께 음모(陰謀)하여 신검에게 난(亂)을 이르킬 것을 권하였다. 그해 6월에 견훤이 만내 아들 능우(能又)와 딸 애복(哀福)과 애첩(愛妾) 섬비(섬비) 등과 함께 나주(羅州)로 달아났다가 입조(入朝:벼슬아치가 조회에 돌아가던 일)하기를 청하므로 장군 유검필(庾黔弼) 외 7명 등을 보내어 군선(軍船) 40여척을 거느리고 해로(海路)로 그를 맞이하게 하였다. 이르매(至) 다시 견훤을 일컬어 상부(尙父:아비와 같이 존경한다는 칭호)라 하고 남궁(南宮)을 관사(館舍)로 주고 위(位)를 백관(百官)의 위에 차지하게 하며 양주(楊洲)를 사(사)하여 식읍(食邑)을 삼게하고 겸하여 금백(金帛)과 노비(奴婢) 각 40구와 구마(구馬) 10필을 사(사)하였으며 앞서 항복(降服)해 온 사람 신강(信康)으로 아관(衙官)을 삼았다.

  그 해 9월에 서경(西京)에 행차하여 해주(海州)를 역순(歷巡)하였다. 10월에 신라왕(新羅王) 김부(金傅)가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를 보내어 입조(入朝)하기를 청하므로 왕이 섭대중(攝待中) 왕철(王鐵)과 시랑(侍郞) 한헌옹(韓憲邕) 등을 보내어 가서 회보(回報)하게 하였다.

  11월에 신라왕(新羅王)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왕도(王都)를 떠남에 사인(士人) 서민(庶民)들이 다 뒤를 따르는지라 향차(香車) 보마(寶馬)가 연달아 30여리에 뻗티고 도로가 꽉 메워져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을 둘러싼 것 같았다. 연로(沿路)에 주현(州縣)의 공대(供待)가 매우 성대 하였는데 왕은 사람을 보내어 위문하였다. 신라왕(新羅王)이 왕철(王鐵) 등과 함께 개경(開京)에 들어오니 왕(王)은 의장(儀仗)을 갖추고 교외(郊外)에 나와 맞아 위로(慰勞)하고 동궁(東宮)과 여러 재신(재신)에게 명(命)하여 호위하고 들어와 유화궁(柳花宮)에 머물게 하였다.

  그 후 정전(正殿)에 나아가 백관(百官)을 모으고 예(禮)를 갖추어 장녀(長女)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신라왕(新羅王)에게 시집보냈다. 신라왕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본국이 오랫동안 위란(위란)을 겪으매 나라의 운수가 이미 다하여 다시 기업(基業)을 보존할 가망이 없는지라 원컨대 신하의 예로서 뵈옵고자 하나이다"라고 하매 왕(王)이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12월에 군신(君臣)이 아뢰기를 "하늘에 두 해가 없고 땅에 두 임금이 없다 하옵거늘 한 나라에 두 임금을 백성이 어떻게 감당하겠나이까? 원(願)하옵건대 신라왕(新羅王)의 청(請)을 들어주옵소서"라고 하였다.

  그 후에 천덕전(天德殿)에 나아가서 백관(百官)을 모으고 말하기를 "짐(朕)이 신라와 함께 삽혈( 血)하고 동맹(同盟)하여 양국이 호의를 길이 맺어 각각 사직(社稷:國家 또는 朝廷)을 보전할까 하였더니 이제 신라왕이 굳이 칭신(稱臣)하기를 청하고 경(卿) 등도 또한 이렇게 하는 것을 옳케 여기니 짐(朕)이 마음으로는 비록 부끄럽게 여기나 여러 사람의 뜻을 어기기가 어렵도다"라 하고 신라왕의 정하(庭下)에서 알현(謁見: 신분이 높은 사람을 면회하는 것)하는 예를 받으니 군신들의 칭하하는 소리가 궁궐에 진동하였다.

  이에 김부(金傅)를 제배(除拜:임금이 바로 벼슬을 시키는 것)하여 정승(政丞)을 삼고 태자(太子)의 상위에 두어 세록(歲祿) 천석을 급여(給與)하고 신란궁(神鸞宮)을 세워 그에게 사(賜)하였다. 그의 시종자(侍從者)들도 아울러 받아들여 전록(田祿)을 넉넉히 사(賜)하고 신라국을 삭제하여 경주(慶州)라 하고 이어 식읍(食邑)으로 삼아주었다. 이와 같은 국내외에서 일어난 유익한 사실을 예빈경(禮賓卿) 형 순(邢順) 등은 당(唐:後唐)에 들어가 알렸다.

  또한 두 번째는 고려(高麗) 태조(太祖) 20년(서기 937년) 5월에 석경당이 후당을 무너뜨리고 후진(後晋)을 세우자 왕규와 함께 황제의 등극(登極)을 축하하는 사절로 다녀오기도 했다. 그는 왕건 밑에서 문장과 지모를 발휘해 밀직사(密直使)에 추봉(追封)되었다. 송악산(松嶽山)의 제영(제영)에서 당나라와 진나라에 예빈경으로 또한 사절로 다녀왔던 흔적이 나타나 있다.

4 世: 형 명(邢 明)

   삼한공신사도(三韓功臣司徒: 正一品官) 고려조에 사마(司馬), 사도(司徒), 사공(司空)의 삼공(三公)을 설치하였으며, 각 정일품관(各 正一品官)으로 삼사(三師)와 더불어 국왕의 국왕의 고문 또는 최고의 명예직이었다.

4 世: 형 시(邢 時)  ; 명(明)과 형제(兄弟)

   형 명(邢 明)의 제(弟)로 고려 때에 정당문학(政堂文學: 從二品)을 지냈다.

시(時)아들: 군기승(軍器丞: 從三品官)

  ***승(丞)은 대장군이고 성종 14(서기 995)년부터 위계(位階)변화로 제정.형 시(邢 時)의 손자: 환위공자(環衛公子)의 군역(軍役)에 충당(充當) 중 거란(거丹)에 잡혀감. 그 후 서기 1055년 귀국(45년간 거란에서 납치생활 함). 시(時)이 증손자: 거란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귀국함

  문종 10년(丙申; 서기 1056년) 2월에 유사(有司:官史)가 아뢰옵기를, "진(秦) 번인(蕃人:오랑케 또는 외국인)에게 잡혀간 염가칭(廉可稱:마음 가짐이 맑고 조촐한 사람이라고 일컬음)은 군기승(軍器丞) 위(位)의 아들로 삼한(三韓) 공신(功臣) 사도(司徒) 형명(邢明)의 손자이온데 현종 원년(顯宗 元年: 庚戌, 서기1010년) 중(中)에 환위공자(環衛公子)의 군역(軍役)에 충당(充當) 되었다가 때마침 거란병(거丹兵)이 경성(京城)에 난입(蘭入)하였으므로 놀라서 양친(兩親)을 모시고 고향인 봉성현(峰城縣:경기도 파주)으로 피난가다가 도중(道中)에서 적(賊)을 만나 잡혀갔던 것입니다. 청녕 원년(淸寧 元年: 고려 文宗 9년, 서기 1055년) 정월(正月)에 아들 하나를 데리고 도망하여 왔아오니 청(請)컨대 가칭(可稱)에게 부조(父祖)의 영업전사(永業田舍)를 다 환급(還給)하도록 하옵소서" 한데, 제(制)하기를 "가칭(可稱)은 공신(功臣)의 묘예(苗裔:대대로 문벌이 높은 집안으로 벼슬이 속출하는 가문으로서 정년(丁年)에 포로(捕虜)되어 번인(蕃人)에 처자(妻子)를 버리고 한 아들만 데리고 백발이되어 돌아오니 참으로 애처로운 일이다. 구업전려(舊業田廬)를 돌려주도록 하라"고 하였다. [고려사 참조]

5 世: 형연기(邢硏機)

   검교상서(檢校尙書) 우복야(右僕야: 正二品)를 지냈으며 고려 광종(光宗, 서기 965년)경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정종(靖宗)의 휘(諱)는 형(亨)이요 자(字)는 신조(申照)이니, 덕종(德宗)의 모제(母弟)로 현종(顯宗) 9년 7월에 탄생(誕生)하였다. 숙성하고 명민(明敏)하여 5세(歲)에 내사령(內史令) 평양군(平壤君)에 봉(封)하게 되었으며, 덕종(德宗) 3년 9월에 고명(顧命)을 받아 중광전(重光殿)에서 즉위(卽位)하였다.

  대묘(大廟)에 삭(朔)을 고하고 덕종(德宗)을 숙릉(肅陵)에 장(葬)하고 중외군신(中外群臣)들의 하례(賀禮)를 받았다. 송(宋)의 상객(商客)과 동서번(東西蕃)과 탐라국(耽羅國)이 각기 방물(方物)을 바쳤다. 팔관회(八關會)를 설(設)하고 신봉루(神鳳樓)에 거둥하며 백관(百官)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동서이경(東西二京) 동북양로(東北兩路)의 병마사(兵馬使), 사도호(四都護) 팔목(八牧)이 각기 표(表)를 올려 진하(陳賀)하는 외에도 여러 곳에서 방물(方物)을 바치매 좌석(坐席)을 사(賜)하여 광례(觀禮)하게 하니 이후로는 상례(常例)로 삼았다.

  조정(朝廷)에서는 관리(官吏)를 모두 정리하고 국로(國老)로서 80세이상의 남녀를 구정(毬庭:넓은 마당)에서 친히 향연(饗宴)하였다. 정종 원년(靖宗 元年:서기 1035년) 6월, 현종 14(癸亥 서기 1023)년에 치사(致仕:官職을 내놓코 물러남)한 연기(硏機)를 검교상서(檢校尙書) 우복야(右僕야)로 삼고 이징좌(李徵佐)로 상서병부시랑(尙書兵部侍郞)을 삼으니 노인(老人)을 우대(優待)함을 보인 것이다.
  검교(檢校)라 함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훈관(勳官)이다. 연원은 중국 동진시대(東晋時代)로 거슬러 올라가나 이는 실직(實職)이었고, 실제로 훈관으로서의 검교관제는 당나라때 부터라고 한다. 당대 이래의 검교관제는 송나라 때에 더욱 정비되었다.
  우리 나라에서 검교관제가 시행된 것은 당나라가 신라왕에 대하여 검교태위(檢校太衛)를 책봉하면서 부터였다. 그리하여 오대(五代)로부터 송나라를 거쳐, 견훤(甄萱)과 고려의 태조(太祖)로부터 성종(서기 997년)에 이르는 역대왕이 훈관의 제수를 받았다. 훈관인 검교제가 채용된 것은 고려 초기의 관제정비 과정에서였고, 보편적으로 시행되기는 현종(서기 1010년)때 부터였다. 고려가 건국된 직후로부터 전제(田制)와 관제(官制)가 개편 정비되어감에 따라 관리의 채용에 있어 정원제가 성립되었다. 이같은 추세 속에서 실직

의 제수에 대한 한계가 드러나 모든 관리의 무제한 승진의 기회를 봉쇄하면서, 관리의 공훈에 대한 포상을 겸하여 누진에 따를는 탈출구를 마련한 제도가 검교제였다.

6 世: 형 관(邢 寬)

   고려(高麗) 때 한림(翰林) 겸 수찬(修撰) 문하시중(門下侍中: 正二品) 평장사(平章事: 正二品)를 지냈고 시(諡) 충장공(忠莊公)을 받았다.

7 世: 형 홍(邢 弘)

   고려(高麗) 때 생원(生員)으로서 피천불사(被薦不仕)하였다.

8 世: 형 온(邢 溫)

   고려(高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직문한(直文翰: 正三品)을 지냈다.

9 世: 형 항(邢 杭)

   고려(高麗) 때 종묘서령(宗廟署令: 正三品)을 지냈다.

10世: 형 완(邢  )

   고려(高麗) 때 판서운관령(雲觀사令:충렬왕 34년에 대사국을 합병하여 서운관으로 개칭하였고, 령은 正三品이고 판서는 령(令)에 동등함)을 지냈다.

11世: 형 존(邢 存)

   고려(高麗) 때 문과에 급제하여 판도판서(版圖判書:從二品 이고 상서령(尙書令)에 동등함)를 지냈다.

12世: 형 헌(邢 憲)

   고려(高麗) 때 봉익대부(奉翊大夫: 從二品), 예의판사(禮儀判事: 正三品)를 지냈다. (예조판서)  (禮儀는 禮曹로 개칭됨)

 

 (관향조)     

13世: 형 방(邢 昉)

    공(公)은 고려 명종(明宗) 정유년(丁酉: 서기 117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고려(高麗) 충목왕(忠穆王) 때 문하시중(門下侍中 :문하성의 從一品 최고벼슬)을 지내고, 평장사(平章事) 대광보국(大匡輔國)을 지냈으며, 경상남도(慶南) 진주(晉州) 반성(斑城)에 정착(定着)하였다. 묘(墓)는 수차의 병화(兵禍)를 입어 실전(失傳)되었다.

14世: 형승서(邢承緖)  

   고려(高麗) 고종(高宗) 을유년(乙酉年, 서기 125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서 문학(文學)을 전담하였으며, 이부상서(吏部尙書: 正二品)를 역임한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높았다. 묘(墓)는 수차의 병화(兵禍)를 입어 실전(失傳)되었다.

15世: 형공미(邢公美)

   시(諡)는 충선공(忠宣公)이다. 고려 고종(고종) 신축년(신축년 서기 1241)에 사마(사마)였고, 원종 8년(서기 1267)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좌복야(左僕射) 이부상서(吏部尙書) 문하시중(門下侍中) 등을 지냈다. 충렬왕 6년 (서기1280) 12월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이듬해 수군(水軍)을 이끌고 일본(日本) 일기도(壹岐島)에 원정(遠征)하여 왜군(倭軍)을 대파(大破) 하여 공(功)을 세워 지밀직사사(智密直司事)로 반사록(班師錄)에서 일등공신(一等功臣)으로 훈봉(勳封)을 받고 진양군(晋陽君)에 봉해 졌으므로,  후손들은 방(昉)을 일세조(一世祖)로 삼고 진주(晉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하여 왔으나 계미보(癸未譜)에 상계(上系) 조상의 행적 기록이 소명하므로 계대(系代)가 十二世 증가되었다. 중시조알기 

참고: 진양은 지금의 진주(晉州)이므로 이때부터 진주(晉州)로 관향(寬鄕)을 삼고 있다.  1975년 8월에 학산(鶴山) 준욱(埈旭)은 종원의 뜻을 모아 전남 구례군 구례읍 봉서리 산 33번지에 공(公)의 아들 문궤(文軌), 손자 찬(贊), 증손자 군소(君紹)의 4위(四位) 설단(設壇)에, 신도비(神道碑) 봉선비(奉先碑) 장군석(將軍石) 상석(床石) 비(碑)를 수립(竪立)하였다.  그후 후손들은 수차의 병화(兵禍)를 입어 실전(失傳)된 조상님들 묘(墓)에 안타까워 하며 충선공(忠宣公)의 조부(祖父) 방(昉), 부() 승서(承緖)의 비()을 서기 2018년 봄 진주형씨대종회(晉州邢氏大宗會) 18대 회장 형백우(邢栢宇) 외는 대종회의 심의을 거처 종원일치의 뜻을 모아 같은 단소(壇所)에 추가로 비( 碑)을 세워 2위(二位)을 모시계 되었다.  향사일은 음력 3월 초9일 지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2005년부터 음력 3월 둘째주 일요일에 구례 종가 창우(昌宇), 철우(鐵宇) 등이 2021년 까지 모셔왔으며, 2022년 부터 대종회(大宗會)에서 시제를 모시기로 하였다.

16世: 형 문궤(邢文軌)

고려 충렬왕(충렬왕) 17년(신묘, 서기1291)에 문과(문과)에 급제하여 통헌대부(통헌대부) 예부상서(예부상서)를 지냈다.  공(공)은 충직(충직)한 마음가짐으로 궁정에 출입(출입)하여 나라 장래에 따르는 간쟁(간쟁)을 여러차계 하였다.  

17世: 형 찬(邢 贊)

13世:형 방(邢昉)의 현손(玄孫) 찬(邢贊)은 조선조(朝鮮朝)에서 통헌대부 판도판서(版圖判書:판도사의으뜸벼슬)를 지냈고, 남원의 정착조로서 출생(서기 1424년 )은 진주에서 태어났으나 남원군 주생면 영천리에 정착하여 살면서 덕망이 고명하고 돈목(돈목)에 지전(지전)하였으며 도학과 문장이 남달리 뛰어나 사표(사표)가 되었다. 아들 4형제를 두었으나 장남 군자와 이남 군정은 무후(无后)하고,

3남 18世: 형군소(君紹)가 20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평양윤(平壤尹)을 거쳐 춘천(春川), 회양(淮陽), 강릉(江陵)등 삼도(三道)의 순찰사(巡察使)를 지낸 후 이부상서(吏部尙書), 정당문학(政堂文學)등을 지냈으며, 문장(文章)이 뛰어나 [동문선(東文選)]에 [부벽루운(浮碧樓韻)]이 전한다.  anib11.gif 판사공파 파조(判事公波祖)이시다.

 4남18世 :korea01.gif 형군철(君哲)은 세종(世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 강계부사(江界府使) 등을 지내고 충청도 병마사(兵馬使)를 지냈고 전라남도 남평(南平)에서 살았다. 병사공파 파조(兵使公波祖)이시다.

이들의 후대(後代)에서 가문이 크게 번창하였다.

18世: 형군소(邢君紹) anib11.gif 판사공파 파조(判事公波祖)

자(字)는 성주(聖株)이며 호(號)는 경재(景齋)이다. 고려 충정왕(忠定王) 원년(서기 1350)에 출생하였다.  공민왕(恭愍王) 17년(서기 1369)에 문과에 급제하여 민부전서(民部典書)로 평양윤(平壤尹)을 거쳤고 춘천(春川), 회양(淮陽), 강릉(江陵)의 삼도관찰사(三道觀巡察使)를 거쳐 통헌대부(통헌대부) 이부상서(吏部尙書)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다. 공은 문장(文章)이 뛰어나 [동문선(東文選)]에 [부벽루운(浮碧樓韻)]이 전하고 있는데, 세칭(世稱) 유종이라고 칭했다.  또한 성품이 본래 온아하고 굳세였으며 충신(忠信) 독경(篤敬) 하였다. 판사공파 파조(判事公波祖)이시다.

19世: 규(珪)  군소(君紹)의 아들    

 자(子)는 쌍옥(雙玉)이며 호(號)는 주포(周浦), 우호(又號)는 송암(松菴)이다.  고려(高麗) 우왕(禑王) 원년(서기 1376년)생이다. 조선조(朝鮮朝) 태조(太祖) 5년(서기 1396)에 문과에 급제하여 태종(太宗) 14년(서기 1414)에 봉익대부(奉翊大夫) 호조판서이고 숭정대부(崇政大夫) 보국당상(輔國堂上)을 지냈다. 공은 본래의 성품이 충직하고 청백한 성품에 임금님의 잘못을 간(諫)하였다. 같이 있는 사람들은 훌륭함을 중국의 급암(汲암)에 비(比)하여 말하기도 하였다. 형 규(邢 珪)의 앞에서는 모든 말을 항상 조심하여 올바른 말만 하게되는 엄격한 분이였다. 문중의 중심 인물 이기도하다.

18世: 형군철(邢君哲) anib11.gif 병사공파 파조(兵使公波祖)

자(字)는 성희(成希)이며, 호(號)은 묵암(默菴)이다.
조선(朝鮮) 세종(世宗) 3년(辛丑, 서기 1421)에 출생하였다. 서기 1444년에 사마(司馬)에 오르고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첨정(宣傳官僉正)을 지낸 다음 강계부사(江界府使)와 충청병사(忠淸兵使)를 지냈다. 공(公)은 슬기로운 계략에 뛰어난 사람이다. 판서공파조(判書公派祖) 군소(君紹)의 아우이다. 남평(南平) 화지촌(花枝村)에 정착한 이래 후손들이 눌러 살고 있는 곳이다.  
병사공파조(兵使公派祖)이시다.

이 후 부터는 선조님들의 업적을 각 분파별로 기록하였음.

선조님들의 업적 판서공파(公派)  바로가기  

선조님들의 업적 병사공(兵使公派)  바로가기  

참조: (진주형씨(晉州邢氏)의 가장 어려운 수난기)

20世:형인기(邢仁奇)는 태종 신묘에 문과에 오르고 자헌대부 좌찬성을 지냈다.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21世:형 수(琇)는 세종 을묘에 문과에 올라 영광군수(호조한의겸 대사간)이고, 이남 21世:형 근(瑾)은 세종 을묘에 문과에 올라 통정대부 칠원 현감을 거쳐 단종계유(1453년)에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로 있을 때 수양대군(세조)에 의해 단종이 쫓겨 나게 되자 충신들은 단종을 복위하려 모의했다가 들통이나 잡혔다. 이때에 21世:邢 수(琇)와 형 근(瑾)형제는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남원에서 있던 중 병자년에 박팽년, 성삼문, 이개등 사육신의 석방 요청의 상소를 하였던 관계로 21世:형 수(琇)는 장흥으로 피신한 후에 아들 22世:형 손(遜)은 수원으로 은거하여 후손이 살고 있으며, 21世:형 근(瑾)은 강직하여 사육신과 동시에 순절하고 말았다. 가족들이 위험한 처지에 놓이자 21世:형근의 아들22世:형계선(繼善)은 15살의 나이로 선고의 순절 때 북쪽을 바라보고 통곡을 하면서 상왕은 지하로 올라가고 나의 아버지는 역시 지하에 돌아왔다 하였다. 5일치 상을 치고 세조 병자년(1456년)에 주생면 영천리에서 사매면 대신리로 피화 하여 이곳남원의정착조가되었다.  삼남 21世:형 박(博)은 경남 거창 으로가고, 사남 21世:형 균(均) 과오남 21世:형 강(堈)은 전주 방면에 모두 피화 하게되는데  이때가 晉州邢氏의 일문에 가장 어려운 수난기였다.         계속      판서공파 선조님들의 업적  /  병사공파 선조님들의 업적 

  판사공파 세계표         병사공파 세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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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기 2000년 9월 호반의 도시 춘천에서 형백우(邢栢宇) 인사드립니다.